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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하스씨/읽는거

비상한 용기 없이는 불행의 늪을 건널 수 없다.

by 박하스. 2008.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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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고든 리빙스턴 지음 / 노혜숙 옮김, 리더스북


두번째 진실 : 비상한 용기 없이는 불행의 늪을 건널 수 없다


누구나 불행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겨내지 못할 불행도 없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기연민을 이겨낼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울증의 우너인은 여러 가지지만 그 증세에는 한결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몹시 고통스럽다는 것이죠.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슬픔, 의욕상실, 수면장애, 식욕부진, 충동적인 폭력 등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통해 고통을 줄여나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옆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증세가 좋아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이 우울한 감정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봅니다. 혹시 우울한 기분을 계속 품고 있으면 언제든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크게 동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래서 자신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우울증의 한 증상이기도 한 만성적인 염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염세주의자를 '각성'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이미 낙담하고 있으므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도 무감할 뿐입니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최악의 경우만 예상해왔던 터라 왠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늘 우울한 사람에게 그 기분을 떨쳐내고 행복한 감정을 느껴보라고 하면, 아마도 겉으론 그리하겠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속으론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하겠지요. 행복해진다는 것은 언젠가 그 행복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인데, 왜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일이든 모험이 따릅니다. 발명이나 탐험, 혹은 사랑은 반드시 실패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만일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면 자연히 모험을 멀리하게 됩니다. 탐험의 뱃길을 되돌리고 사랑의 전선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결국 첫째도 안전, 둘재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안전이 최고의 가치처럼 느껴집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안전벨트를 매고, 문을 이중삼중 자물쇠로 잠그고, 담배를 끊고, 해마다 정기검진을 받고, 운동 전에는 의사와 상의하고, 날씨에 대해 걱정하고, 자녀들의 귀가를 염려하고, 도둑을 대비해 집에 경보장치를 설치하고, 길을 걷다 변을 당할까봐 가스총을 가방에 넣어 다니고......


  결국 우리가 해야할 모험은 경찰이나 소방관, 군인, 운동선수 등이 대신합니다. 그리고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수많은 왕자와 공주들입니다. 혹은 힘을 가진 조직의 보스가 소시민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터무니없이 과장된 용기와 의리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에 열광하지만, 정작 그런 삶으로부터는 소외되어 있습니다. 안전만을 추구하는 생활태도가 가져다준 씁쓸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생활태도를 바꿔보라고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절망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우울증을 질병이라 여기고 약에만 의존하려듭니다. 그러니 증상이 호전될 리 없습니다. 이점은 정신 의학계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게다가 보험회사까지 나서서 심리치료 청구비를 조금씩 깎아내리는 것으로 이런 추세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심리치료는 변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사람들의 불안감, 슬픔, 방황, 분노, 공허감 같은 감정 상태를 바꾸고자 합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주로 우리 자신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하는 능력을 상실했거나 상실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집이나 오락실에 틀어박혀 삽니다. 그러면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에 중독된 채로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모형제들과도 얘기하는 걸 꺼려합니다.


  그러다보니 운전이나 쇼핑은 물론이고, 때로는 집을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부담스러워 하다가 급기야는 조소하고 능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심리 상태는 자연히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때 희망을 다시 불어넣어주는 것이 심리치료사가 하는 일입니다. 나는 종종 내담자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살아가는 데 희망이 있습니까?"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질문에 대답할 리 만무합니다. 오로지 그들은 삶을 마감하는 것에만 골몰합니다. 따라서 나는 자살을 공롱화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야만 해마다 늘어나는 자살자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모든 자살 결정에는 타인에 대한, 혹은 자기자신에 대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살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저주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개인적인 절망의 표현이지만, 또한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랑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살은 오로지 자신에게 몰두해 있다는 증거지요. 나는 자살자들에게 동정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대신, 그러한 자기파괴 행위에 함축된 이기주의와 분노를 직시하도록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살을 단념할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못합니다. 정신의학자로 33년 동안 일해오면서 나는 불행히도 이러한 신념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두 아이를 둔 어느 젊은 여인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혼한 뒤 우울증을 앓다가 병원에 입원하기로 한 날에 권총자살을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집에 가서 시신을 확인하면서 그때까지 내가 품고 있던 오만한 생각들을 버렸습니다. 절망한 사람의 생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환상이 그날로 날아가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 나는 소중한 아들 앤드루를 잃었습니다. 그 아이 역시 조울증으로 3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앤드루는 당시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슬픔을 벗삼아 지내고 있습니다.


  앤드루의 일을 통해 나는 아비가 자식을 땅에 묻는 슬픔이 세상의 어떠한 슬픔보다 크고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수없이 많은 날들을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라고 한탄하면서 지냈습니다.


  앤드루가 절망과의 오랜 투쟁에 두 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우리 부부에게 기쁨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던 아이,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나의 앞에서 영광을 보여줄 줄 알았던 아이가 우리 부부를 매정하게 버린 거지요.


  앤드루는 모범새이었고, 고등학교 때 반장을 했으며, 대학 2년 때는 학생회 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나는 아이가 아홉 살 때 학교 숙제로 쓴 긍릉 릭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런 구정이 있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경에 아빠와 나는 한시간 넘게 달렸다. 우리는 바람을 안고 달려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아빠 뒤에 숨었고, 아빠는 나를 위해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200명의 다른 주자들과 경쟁을 했다. 가파른 언덕이 많아서 힘든 코스였다. 우리는 막판 속도를 내서 몇 사람의 주자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운동장에 도착해서는 반 바퀴를 더 달려야 했고, 결국 21킬로미터, 하프 코스를 완주했다.


  이런 글을 썼던 아이한테 혹독한 병의 증세가 나타난 겁니다.  아이는 세 차례 입원을 했고, 조울증 환자의 특징이라 할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겪었습니다. 나는 아이가 마지막 순간에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기대감으로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갈구하던 평활르 발견했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소망만이 내가 고통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줍니다.


  아이의 병은 그 누구도 어찌해볼 도리 없는 태풍처럼 아이를 휩쓸어 갔습니다. 아이는 너무 빨리 떠났지만, 나는 아이가 우리를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아이를 용서하면서, 아이도 아버지로서 부족했던 나를 용서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 아이의 웃음소리를 기억할 때마다 내 귀에는 톰 팩스턴이 부른 옛 노래가 잔잔히 들려옵니다.


  작별의 말 한다미 없이 떠나가는 건가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당신을 좀더 사랑했어야 했어요.

  내가 무심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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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가지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풍요로운 이 시대가 우리를 더욱 절망하게 하고 우울증에 빠져들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거대한 군중의 틈바구에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더 큰 상실감과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이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작스레 잃을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는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행복해지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습니다. 슬픔 속에 자신을 그냥 놓아두지 마십시오. 절망에 빠져 있는 자신을 무섭게 채찔질하십시오. 희망을 꼭 껴안고 그 팔을 결코 풀어주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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